내면의 몸부림을 그침으로써만 죄책감을 없앨 수 있다.
자신을 믿을 필요도, 설득할 필요도 없다. 그저 싸우기를 거부하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라. 그러면 이렇게 된다. 주변사람들이 당신을 더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게 된다. 그들의 눈에는 당신의 의미가 더욱 커져 보이기나 하는 듯이 말이다. 이 사실을 깨닫은 즉시 자신을 믿거나 설득할 필요가 전혀 없어져 버린다. 당신의 그저 '알게' 될 것이다.
이 역설은 어김없이 작용한다. 의미를 찾기 위한 몸부림은 당신에게서 자유에너지를 빼앗아가서, 그것을 가능태의 흐름을 거스로고 잉여 포텐셜을 만들어내는 데에 소모하게 한다. 그러면 그것이 균형력의 바람을 일으킨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얽힌 실타래를 더욱 꼬이게 만들어 온갖 불상사를 초래한다. 당신은 그것을 풀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저 자신의 의미를 높이기 위한 몸부림을 멈추라. 그러면 남는 일이란 오직 그 결과에 놀라고 행복해할 일뿐이다. 그럴 때 당신은 눈앞에서 당신의 의미가 저절로 커지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자기 평가가 높아지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에 동의할 것이다.
자기 평가를억지로 높이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죄책감을 쫓아내려고 애쓰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당신이 죄책감을 잘 느끼는 편이라면 그것을 쫓아내거나 무마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 비하에 대해서 했던 것과 똑같이 하면 된다.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쓰지 말라. 정말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 최악의 경우에만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 당신이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당신의 행위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점을 기억하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단죄하지도 말고 방어 하지도 말라. 조종자가 허공 속으로 헛발질하게 하라. 흥분하지 말고 조용히 재판정을 떠나라. 그곳에 모인 자들은 남들의 죄책감으로부터 이득을 얻어내는 데 익숙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라. 만일 당신이 매우 심각한 죄책감을 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양심을 약간 억눌러도 괜찮다. 당신의 의미를 남들의 판단에 맡기지 말라.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그리고 내면의 몸부림을 그침으로써만 죄책감을 없앨 수 있다. 죄책감이 연기처럼 저절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의미를 높이려고도, 자신을 정당화하려고도 몸부림치지 않음으로써 당신은 내적 중요성의 상당 부분을 감쇄시킬 것이다. 자신의 의미 높이기와 죄책감에 빠지는 것이 내적 중요성이 보여주는 주요 증상이다. 다른 모든 잉여 포텐셜은 이 두 가지로부터 파생된다. 지킬 것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당신은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상대방을 공격할 필요도 없다. 멋진 속담이 있다. "상대방을 위협하지 않는 한 나도 겁낼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외부 대상들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면 그것들도 더 이상 그 의미로써 당신을 좌지우지하지 못할 것이다. 두 가지의 강력한 외적 중요성이 있다. 문제의 어려움과 불확실성이 그것이다. 이 두가지가 다 걱정과 초조의 강력한 포텐셜을 일으킨다. 사람은 늘 뭔가를 걱정하고 있다. 불안한 사람은 문제의 무게 앞에 굴복하여 어떻게든 그 짐을 끌고 다니는 편을 택한다. 강한 사람은 어려움을 힘과 결단력으로 극복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자신감의 잉여 포텐셜로써 어려움의 벽을 부수고 요새를 공략한다.
불안과 자신감은 둘 다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 전자의 경우, 에너지는 대부분 걱정하면서 초조해하는 데에 소모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힘으로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에 소모된다. 이 두 가지가 가장 널리 애용되는 외부세계와의 작용 방식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쉬운 방법이 있다. 외적 중요성을 내려놓고 가능태의 흐름과 싸우기를 그만두기만 하면 장애물은 저절로 제거된다.(계속)
바딤 젤란드<리얼리티 트랜서핑> 중에서~